
꿈
_뀨이잉
내리누르듯 무거운 열기와 습기에 정신은 한껏 몽롱해져있었다. 무더위에 짜증을 내는 행인이 하나, 걸음을 빨리하는 행인이 둘. 흐릿하게 시야에 잡힌 그들은 곧 멀어져갔다. 밖에선 안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을 구조의 공터. 주변에 몇 명 더 있었나, 그와 아쿠타가와 둘만 있었나, 하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쿠타가와에게는 그만이 또렷이 보였으니까. 그, 다자이는 여전히 생각을 알 수 없는 가벼운 표정이었다. 눅눅한 공기, 아른히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그 한가운데의 당신. 명치끝이 턱 막히는 답답함에 조금 머뭇거렸던 것도 같다. 무엇일까, 불안감일까.
“ - ”
혈색 없는 입술에서 내뱉어진 단어는 습기를 머금고 가라앉았다. 단어는 흩어지는 대신에 분명하게 귀 안에서 울렸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아쿠타가와는 그에게 닿았기를 바라고 있었다.그의 귀를 파고들고 뇌 안으로 심어져, 그 의뭉스런 표정을 깨고,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기를, 평소와 같이 가볍게 거리를 두길 바랐다. 제 말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길 바랐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게 그랬던 것처럼. 감정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심통, 혹은 좀 더 처절한 무언가와 닮아있었다. 갈색의 눈은 아직도 무엇을 담았는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태양빛의 마수는 기어코 아쿠타가와의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든 모양이었다. 문득 생각했다. 태양이 꼭 저를 태울 것만 같다고, 재 한 줌 남기지 않고 새하얗게 불태울 것 같다고.
의미 없는 생각이 지속될 때쯤, 다자이가 등을 돌렸다. 아쿠타가와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당황과 불안으로 손을 뻗었다.
잡을 수 없었다.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는 생각에 손을 물렀다. 검게 침잠한 눈은 뒷모습을 응시할 뿐이었다.
-어째서.
짧은 의문을 끝으로, 아쿠타가와는 꿈에서 깨어났다. 이맘때쯤이면 종종 꾸는 꿈이었다. 내용은 항상 같았다. 나오는 사람, 주변 풍경, 다자이, -아쿠타가와가 하는 말까지. 본인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수 번 꿈을 꾼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불쾌한 감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꿈에서의 몽롱한 감각이 남은 기분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 찬 물에 찝찝한 감각을 씻어내었다. '포트마피아의 짖지 않는 개'로서의 일상을 시작할 시간이다.
***
유례없는 소나기였다. 부하를 대동하지 않고 나온 아쿠타가와는, 임무를 마치고 복귀 중이었다. 라쇼몽으로 비를 막아볼까 하는 생각까지도 해봤지만 찬물이 피를 씻어내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습관처럼 마른 기침을 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썩 건강하지 못한 아쿠타가와의 몸은 감기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지만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소생은 비 따위에 질만큼 약하지 않다, 며 쓸데없는 자존심을 내세우고.
..발걸음이 멈췄다.
"아쿠타가와 군?"
혼란과 당황이 머릿속을 메우고, 아쿠타가와는 제 앞에 선 이를 응시하였다. 우산을 쓴 다자이가 마찬가지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음에 아쿠타가와는 순간적으로 아침의 꿈을 연상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을 멍하니 있는 아쿠타가와에 다자이가 손을 몇 번 흔들어보더니 등을 돌렸다.
"다자이 씨!"
-그래, 등을 돌렸다. 꿈에서처럼. 비도 오지 않았고, 단지 꿈에 본인이 휘둘린다는 것은 꽤나 불쾌했지만, 다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자이는 한차례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아쿠타가와 군,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나- 평소와 꽤나 다른 모습인데 말이지. "
아쿠타가와는 입을 굳게 다물고 머뭇거렸다. 본인은 무엇을 원하는 걸까. 인정, 그로 인한 삶의 의미. 아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남아있었다. 좀 더 깊숙히, 검게 웅크린 조각이 있었다. 본질이 있었다. 홀린 듯 입이 열렸다.
"-"
꿈에서와 같은 말이었음을, 아쿠타가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단어가 산산히 부서져내린 것 같아보였다. 흔적도 없이 비와 함께 떨어져 아스팔트를 타고 흐르는 것 같이만 보였다. 아쿠타가와는 본능적으로 또 바랐다. 닿았기를, 그에게 영향을 주기를. 닿지 못할 것처럼만 보였던 그가, 제 말로, 영향을 받기를.
결론적으로 반 정도는 성공했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온 말에 다자이는 눈을 잠시 크게 떴고, 이내,
-웃었다. 언젠가는 이런 말을 들을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이미 예상한 것처럼. 의뭉스런 웃음은 가까워졌고, 이내 손을 뻗어 비를 흠뻑 머금은 아쿠타가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랫동안 세찬 비를 맞은 영향인지, 머리가 어지러워 현실인지 꿈인지 경계가 모호한 것 같았다. 분명히 찬 손인데, 따뜻한 감각을 느끼기 힘들 정도로 식어버린 몸인데, 따뜻하다 여겼다.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생각은 읽을 수 없었다.
길었던 찰나가 지나고, 다자이는 손을 떼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향하는 시선을 감추지 않자 조금 웃었던 것도 같다. 평소와 같은, 아니, 평소보다 더 짙은 미소를 머금은 다자이의 눈이 아쿠타가와의 눈과 마주쳤다.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까슬한, 분명히 온기를 담은 무언가가 입술에 맞닿았다. 제 앞에는 다자이만이 있고, 다자이의 얼굴이 눈 앞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쿠타가와는 그것이 다자이의 입술이라는 것을 쉽게 유추해낼 수 없었다. 진득하지만 건조하게 달라붙는 온기에 몸이 빳빳히 굳었다.
"...!"
"자, 그렇게 있으면 감기 걸린다네, 아쿠타가와 군~ 어서 들어가고, 난 가보겠네!"
다자이는 물 흐르듯 유려한 손길로 제가 쓰고 있던 우산을 아쿠타가와에게 들려주고, 비를 맞으며 걸어갔다. 아쿠타가와는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멍하니 쳐다만 볼 뿐이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했다.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는 것.
***
"우산은 어디 두고 이제야 나타나는 거냐!"
돌아오자마자 쏟아지는 쿠니키다의 잔소리와 쿠니키다를 붙잡은 사원들을 가볍게 지나, 다자이는 헤드셋을 끼고 쇼파에 안착했다. 젖은 옷은 아랑곳 하지 않았기에 다시금 노호성이 쏟아졌다. 그 난리통에도 그는 빙글빙글 웃으며 흥얼거릴 뿐이었다.
-닿고 싶습니다, 였나.
문득 갈색의 눈동자가 더 짙은 빛을 머금었다. 그것은 분명, 열기였다. 여름의 열기, 아쿠타가와가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