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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지나고 여름이 왔다. 무더운 햇빛 속에 대지를 흠뻑 적셨던 빗방울들은 어느 순간 증발해 이제는 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열흘 간 이어진 비 때문에 도로는 오랫동안 빗물에 잠겨 있었으며 강물이 무섭게 불어나는 바람에 몇몇 그 근처를 지나다니던 사람이 발을 헛디뎌 익사했다. 비가 그치자마자 경찰들은 익사체를 찾기 위해 두 손 두 발을 걷어붙이고 시체 수습에 나섰다.

찬란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햇살 속에 다자이는 서있었다. 요코하마 구석에 있는 자그마한 호수였다.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이곳은 더러운 악취를 풍기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물이 오염되어 고개를 내밀면 자신의 얼굴이 비춰보였다. 불투명한 호수는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많은 것들이 썩어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빛 한 점 없는 캄캄하고 차가운 물속에서, 모든 것들이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처음에는 살아서 숨 쉬던 어류들이, 그 다음에는 말없이 호흡하던 해조류들이,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시체가 되어 물에 녹아 사라질 무렵 누군가가 버린 쓰레기들이 호수 깊은 밑바닥에 침전하여 자연스럽게 분해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호수는 아주 드물게 시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찾아와 기계를 이끌고서 안에 있는 쓰레기들을 정리했다. 이따금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를 건지기도 했다. 사람들은 요코하마로 흘러들어온 이국의 마피아일 것이리라 짐작했다. 포트마피아와의 세력싸움에 패배한 시체들을 유기한 것이라고. 공무원들은 시체를 경찰로 넘겼으나 그들의 신원이 판명 나는 일은 없었다. 머리카락도 지문도 치아도 남지 않은 시체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호수에 버려진 것들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어간다.

다자이는 한 달 전에 있었던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을 떠올렸다.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에 장례식장은 침울한 분위기였다. 포트마피아라는 조직은 선의의 조직이 아니었으므로 누군가가 죽는 일은 다반사였고, 그렇기에 사람의 마음을 모조리 비워버리는 죽음의 공허함을 무던히 넘길 정도는 되었다. 포트마피아는 요코하마의 그림자였고, 어둠의 질서를 폭력으로 쥐고 있는 조직이었다. 누군가가 죽었다고 한들, 모두가 그렇게 죽어갔기에 달리 슬퍼할 방도가 없었다. 적절한 애도와 함께 장례식을 치루고 다시 일상으로, 피의 세계로 돌아갈 수밖에.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이 치러진 그날은 유난히 비가 내렸다. 유월 중순이었고, 여름의 무더위가 서서히 고개를 내미는 시기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새파랗던 하늘은 새까만 먹구름에 뒤덮여 가늘고 긴 빗줄기를 부지런히 쏟아내고 있었다. 사람들은 새까만 옷에 검은 우산을 받쳐 들고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평소에 찍어둔 사진이 없어 영정사진은 지명수배지에 있던 사진을 그대로 가져다썼다. 시신 없이 비어있는 관에는 애도의 마음을 담은 새하얀 국화꽃이 가득했다. 상주를 겸하고 있는 긴의 옆모습이 초췌했다.

다자이는 인파로 가득한 – 거의 대부분은 포트마피아의 직원들이었다 – 장례식 뒤편에 말없이 서서 아쿠타가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면 제법 마피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죽은 것처럼 창백한 낯빛, 상대방을 고압적으로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매, 꾹 고집스럽게 다문 입술, 어둠 위에 내려앉은 눈처럼 검고 흰 머리칼. 그리고 자신이 주었던 코트.

소중히 여겼던 그 코트라도 관에 넣어주면 좋으련만.

적대 조직의 자폭 행위가 있었다고 했다. 자신의 조직을 남김없이 몰살하는 아쿠타가와를 어떻게든 죽여야겠다는 마음에. 어차피 오른쪽으로 가도 왼쪽으로 가도 죽는 운명이라면 그라도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름 모를 사내는 온 몸에 폭탄을 두르고 아쿠타가와에게로 향했다. 기척 없이 다가가 수류탄의 안전핀을 손에 쥘 수 있을 대로 모조리 잡아당겼다. 잔당들을 처리하고 있던 아쿠타가와는 한발 늦게 사내의 존재를 알아챘고, 공간단절을 발동할 틈조차 없이, 핀이 뽑힌 폭탄은 뼈 한 점 남기지 않고 그의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코트가 그의 목숨과 함께 사라졌다. 폭발소리에 제자리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직원들이 창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그 자리에 남아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곡소리 하나 없이 메마른 장례식이 이어졌다. 국화꽃이 잔뜩 담긴 관이 닫혔다. 관은 영정사진과 함께 미리 파둔 땅 속에 묻혔다. 몇몇 사람들이 삽자루를 쥐고 흙을 덮었다. 긴의 눈가에 눈물이 흘렀다. 비가 추적추적 서글프게 내리면서 긴의 조용한 울음소리와 섞여들었다. 옆에 서서 장례를 거들던 츄야가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기묘하고도 슬픈 장례식이었다. 다자이는 이내 고개를 돌려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는 죽은 아쿠타가와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무엇도.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냐.”

그 한마디가 말없이 사라지려던 다자이를 붙잡았다. 가만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는 츄야가 서있었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곳에서 꽤나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다자이는 뒤를 돌아 츄야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자신감으로 넘치던 새파란 눈빛은 평소와 달리 깊은 그늘이 내려앉아있었다. 그에게도 아쿠타가와의 죽음이 어지간히도 큰 충격인 듯했다. 다자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들어있지 않았다.

“할 말 없으면 이만 갈게. 일이 바빠서.”

“넌 여기까지 와서 그런 말을,”

츄야는 이내 말을 삼켰다. 두 손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분노로 떨고 있었다. 서글픈 분노였다. 그는 기가 찼을 것이다. 제 손으로 아쿠타가와를 거두었으면서 그의 죽음에 무덤덤한 다자이에 대한 분노. 그러나 그 분노는 화살촉이 없는 화살과 같았다. 그가 아무리 화를 내 봤자 아쿠타가와는 죽었다. 죽은 사람을 위해 싸운들, 이미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無)의 세계에 던져졌다. 그는 세계 속에 부재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다자이는 말없이 츄야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간부라고 해도, 수없이 많은 부하들의 죽음을 봐왔음에도 아쿠타가와는 좀 더 각별했던 것일까, 그는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그의 부재를 못 견뎌하고 있었다. 영원한 기다림, 되돌아오지 않는 존재. 츄야에게는 그 무게가 버거운 모양이었다.

비는 여전히 일정한 속도로 가늘고 선명한 직선을 그리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에게는 우산이 없었고, 오롯이 비를 맞으며 서있었다. 다자이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누군가의 그림자 같은 새까만 우산이 츄야의 머리 위로 드리웠다. 잠시 비가 그쳤다.

“츄야, 사람은 누구나 죽어. 아쿠타가와가 죽은 건 유감이지만, 언젠가 다가올 일이었네.”

“……그딴 헛소리 지껄이려고 온 거면 꺼져.”

“아쿠타가와는 폭발로 죽은 게 아니야.”

츄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당혹감과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옅은 희망이 반짝였다. 다자이는 츄야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눈치 챘으나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이미 결말은 정해져있었다. 그에게 아쿠타가와는 더 이상 현재의 사람이 아니었고, 영원히 과거의 사람이 되어 서서히 잊힐 것이다.

다자이는 그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어슴푸레한 희망에 젖은 츄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한 가지 사실을 귀띔해주었다.

“아쿠타가와가 죽을 당시의 폭발 흔적을 치밀하게 조사해보게. 좀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츄야의 머리 위로 빗방울들이 떨어졌다. 그는 멀어져가는 다자이의 무미건조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입가에 고였다.

다자이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 * *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이 끝나자 요코하마는 거짓말처럼 화창한 날씨를 되찾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높고 청명했으며 비에 젖은 공기는 햇볕에 기분 좋게 말라갔다. 나무들 또한 푸르른 녹음이 무성해 덕분에 집 주변의 모든 풍경들이 싱그러웠다. 다자이는 아무도 없는 기숙사 창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했다. 그는 주기적으로 청소를 하는 성실한 타입은 아니었으나 계절이 바뀔 때마다 대대적인 대청소를 했다. 여름 맞이인 셈이었다. 침구를 새로 갈고, 바닥과 천장을 깨끗하게 정돈했으며 계절에 맞는 옷가지들을 꺼내었다. 부엌 싱크대에 잔뜩 쌓여있는 식기들을 세척했고 욕실에 피어있는 곰팡이를 제거했다. 세면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두 개의 칫솔을 제자리에 정리해두었으며, 수건도 미리 꺼내어 수건걸이에 걸어두었다. 냉장고를 열면 그 안에는 무화과 반쪽이 랩에 싸여있었다. 그 위에는 자그마한 메모지가 붙여져 있었다.

생각나실 때 드십시오.

애교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 단정하고 차가운 글씨였다. 자신을 위해 좋아하는 과일을 다 먹지 않고 부러 남겨둔 아쿠타가와가 사랑스러워 다자이는 설핏 웃었다. 정성스럽게 싸둔 랩을 벗겼다. 그리고는 무화과의 볼록한 부분을 엄지로 힘주어 눌러 과육을 입에 잔뜩 머금었다. 은은하고 부드러운 단 맛이 퍼져나갔다. 남은 과육을 모조리 입에 넣고 삼킨 뒤 껍질은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서랍에서 푸른빛을 띠는 풍경을 꺼내 창가에 매달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고, 방안에 은은한 종소리가 울렸다.

상쾌한 바람과 공기가 방안으로 잔뜩 밀려들어왔다. 다자이의 다갈색 머리칼이 바람에 어지러졌다. 청결하고 상쾌한 기분이 전신을 감쌌다.

모든 것은 완벽했다.

집안은 깨끗했고, 오늘 탐정사 직원들은 각자 출장을 떠났다. 다 스러져가는 낡은 건물에 남아있는 사람은 오로지 다자이 하나뿐이었다.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들킬 염려는 없었다. 증거가 남아 그의 발목을 붙잡는 일도 없을 것이다. 수단과 방법은 이미 모두 정해져있었다. 남은 것은 그것을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다자이는 자꾸만 행동을 뒤로 미루었다. 오늘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으니까, 오늘은 건물 아래층에 살고 있는 아츠시가 휴일이라 들킬 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준비가 덜 되어있으니까, 오늘은 무화과가 맛있었으니까. 여러 이유들이 하루에 하나씩 붙어졌다. 다자이는 그것이 하나같이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 무덤덤한 얼굴로 수없이 많은 자살을 반복할 동안 그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더 이상 살지 못할까봐 걱정하지 않았다. 반대로 죽지 못할 까봐 마음 졸이지도 않았다. 타인의 죽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가 죽고, 살아있다는 것에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죽으면 죽는 것이고, 살면 살아갈 뿐이었다. 인생이란 확률 오십 퍼센트의 단순한 도박에 지나지 않았다.

분명, 그럴 텐데.

다자이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도 없는 집안은 고요한 정적으로 차올랐다. 어디선가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해 처음으로 듣는 매미소리였다. 벌써, 여름이 다가온 건가. 아쿠타가와의 장례식 이후로 시간의 흐름이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는 그 사이의 변화들이 덧없이 아름다웠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바람결에 지고, 푸른 나뭇잎들이 팔을 뻗으며 비가 내리고 햇살이 따사로워지는 그 모든 광경들이 뼛속에 아로새겨지는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방안에 차오르던 묵직한 침묵이 초인종 소리에 깨졌다. 다자이는 발걸음을 옮겨 현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아쿠타가와가 서있었다.

“어서와.”

다자이가 웃었다.

 

 

 

* * *

 

 

 

새까맣게 잠겨있던 의식 너머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의 바다에 몸을 맡긴 채 저 소리가 무엇인지 한참을 고민하다 문득 그것이 자신의 휴대폰 벨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실패했군. 전화를 받아야겠다는 생각보다 자살에 실패했다는 사실이 먼저 떠올랐다. 다자이는 침대에 눕기 전, 감기약 스무 알을 입안에 털어 넣었고, 오늘만큼은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의식은 새까만 수면 속에 빨려 들어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어둠 속에 갇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세계는 평온한 안식을 약속해주었다. 이대로 계속 잠든다면, 다시는 세상 속에 눈 뜨며 살아있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그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단 한통의 전화로 인해 깨져버렸다. 또 다시 자살에 실패한 것이다.

나른한 침묵 속에 잠긴 몸은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손을 움직여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에 응답할 수도 있었으나 그의 몸은 그것을 거부한 채 가만히 자리에 누워있었다. 마치 그대로 굳어버린 것처럼, 다자이 앞으로 걸려온 전화는 그를 움직이지 못 했다.

몇 차례 똑같은 음이 반복되다 이내 끊겼다. 좁은 방은 다시금 정적을 되찾았다. 다자이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약기운 때문인지 육신은 노곤함에 젖어있었으나 제 기능을 충실히 하고 있었다. 감기약 스무 알을 먹었음에도 그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갑작스레 환멸이 파도처럼 밀려오며 천천히 눈을 떴다. 잠의 무게에 짓눌려 있던 눈꺼풀 사이로 파랗게 물든 천장의 나뭇결이 보였다. 열어놓은 창문 너머로 바람이 실려 왔다. 창가에 달려있는 풍경의 우아한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고요한 침묵 속에 울리는 풍경소리는 잔잔한 호수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둥그런 파문을 그렸다. 다자이는 오랜 잠에서 깨어나 현재를 인식하려는 듯 눈을 끔벅였다. 방안은 눈부신 햇살에 젖어있었고 공기는 뜨겁게 달구어져 있었다. 호흡할 때마다 햇볕에 바싹 메마른 공기가 폐에 스몄다. 그가 잠든 사이에도 여름은 계속 되고 있었다. 다자이는 팔을 뻗어 휴대폰을 쥐었다. 츄야에게서 다섯 통의 부재중전화와 한 통의 문자메시지가 와있었다.

할 말이 있어. 만나서 얘기해.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서 다자이는 그가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에서 알려준 가벼운 힌트에 대한 대답을 찾아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자이는 간결하게 시간과 장소를 전송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는 분명 확인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잠 들고서 이틀이 겨우 지났다는 사실은, 휴대전화로 날짜를 확인한 덕분에 알 수 있었다. 감기약으로 자살을 시도하는 건 그다지 유용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음에는 수면제 스무 알을 시도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수면제는 썩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이 아니었으나 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심지어 마약을 얻는 것 또한 가능했다. 포트마피아의 마약이 어느 항구로 통해 어떤 루트를 이용하여 판매되는지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자이는 깊은 한숨과 함께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오랫동안 잠든 탓인지 몸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어깨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관절이 녹슨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손을 주무르고 억지로 기지개를 켜고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현실에 적응시켰다. 다음 자살을 위해서라도 육체를 제대로 움직이게 하는 편이 유익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돌렸다.

기숙사의 작은 원룸은 이부자리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만으로도 부엌이 바로 보였다. 손에 닿을 정도로, 매우 가까운 거리에 낯익은 뒷모습이 기척도 없이 서있었다. 그는 낡은 체크무늬 앞치마를 두르고서 서툰 칼질을 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도마 위를 움직이는 칼끝이 재료들을 일정한 크기로 잘라냈다. 새까만 뒤통수에 끝이 새하얀 머리칼, 가늘어서 손에 쥐면 부서질 것 같은 창백한 목덜미, 옷을 입었음에도 드러나는 가녀린 몸매, 팔 하나에 꼭 담기는 허리. 소매를 걷어붙인 채 열중하여 재료를 손질하는 그는, 분명.

“아쿠타가와.”

그 이름을 부르면 그가 뒤돌아 자신을 바라보기도 전에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아쿠타가와가 서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메마른 수도꼭지만이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도, 도마와 식칼을 꺼내든 흔적도 어디에도 없었다. 다자이는 허망하게 웃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지나치게 선명한 기억에 구역질이 났다. 나는 어쩌자고 이 모든 것을, 이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나. 아쿠타가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포트마피아에서는 비 오는 날, 그의 장례를 치러주었고 시신이 없는 빈 관이 땅 속에 묻혔다. 아쿠타가와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죽은 사람을 떠올려봤자 남는 것은 처절하리만큼 선명한 환멸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미 오다사쿠의 죽음을 통해 배우지 않았나.

그러나 다자이의 뇌는 아쿠타가와의 기억을 누구보다도 선명하게 재현해냈다. 마치 아직도 자신의 집에 종종 놀러올 것처럼, 문득 초인종을 누르고 찾아올 것처럼, 그렇게. 터무니없이 선명한 환영이 다자이를 괴롭혔다.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떠올라 다가가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째서 자신이 아쿠타가와를 ‘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 마치 그러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머리는 살아있는 것만 같은 환상을 만들어냈고, 다자이는 그로부터 도망치려 애썼으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자이는 환상을 잊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물을 마셨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현실감각이 되돌아왔다. 잠에 빠져 허우적대던 정신도 말짱해졌다. 아쿠타가와는 죽었다. 다시금 그 사실을 상기하며 냉장고에 넣어둔 레토르트 식품을 몇 개 꺼내 먹었다. 허기를 채우고, 몸을 움직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오랜만에 일어났으니 장을 보기로 했다. 쓸데없는 채소들을 몇 개 버리자 냉장고가 텅 비었기 때문이었다.

꼼꼼하게 이를 닦고 세안을 하고 샤워를 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집을 나서기 전 좁고 낡은 자신의 방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이 적막한 방안에는 풍경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신이 잠든 사이의 풍경도 저러했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열쇠를 손에 쥐고 문밖을 나섰다. 바깥은 그가 잠들기 전보다 아주 조금 더, 더워져 있었다.

 

여름의 저녁놀은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처럼 하늘을 물들이며 지평선 아래로 사라졌다. 해가 길어져 저녁 일곱 시가 넘어도 크게 어두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바깥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돌아오는 길, 붉게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며 기숙사로 향했다. 한손에는 근처 슈퍼에서 산 장거리가 비닐봉투에 가득 담겨져 있었다. 물론 신선 식품은 거의 없었다. 대부분이 레토르트 식품으로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기만 하면 완성되는 것들을 위주로 샀다. 다자이는 요리에 재주가 없었고, 가끔 집에 들러 음식을 해주고 가던 아쿠타가와 또한 이제는 없었다.

아쿠타가와는 음식은 적게 먹으면서 손이 커서 요리를 하면 양이 제법 되었다. 요리를 해주겠다며 프라이팬 한가득 볶아놓은 채소볶음 더미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요리의 대부분이 밑반찬이었기에 냉장고에 넣어두면 오래 꺼내 먹을 수 있었다. 가끔은 과일 같은 것을 깎아두고 가기고 했다. 기숙사 위치와 열쇠 보관함의 위치를 알려준 이후로 그는 꾸준히 다자이의 집을 다녀갔다. 얼마간은 함께 살기도 했다. 이주가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다자이는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세상은 그를 지명수배범이라 칭하며 공포의 대상으로 부각시켰지만 가까이에서 본 그는 제법 귀여웠고, 4년 전보다 제법 성숙해져있었다. 요리 실력도, 청소도, 사람을 대하는 방법도 꽤나 능숙했다. 그런 그에 대한 감상을 솔직하게 말할 때마다 목덜미를 붉게 붉히며 고개를 돌리는 아쿠타가와를, 그런 그의 새까만 뒤통수를 다자이는 기억했다.

이번 여름동안 그는 다자이의 집에서 반팔차림으로 지냈다. 언제나 죽고 못 사는 코트는 옷걸이에 걸어 가지런히 정리해두었고, 집에 있을 동안 단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의 팔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었다. 입도 점점 짧아졌고, 조금 침묵이 늘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자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영원한 이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쿠타가와의 생명은 중력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래시계처럼 일정한 속도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는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시간이 길어지고, 텔레비전의 백색 소음이 방을 가득 채우는 일이 길어질 때마다 다자이는 아무 말 없이 앉아있는 아쿠타가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겨 앉혔다. 그의 체온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낮았고, 몸은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처럼 가늘었다.

아쿠타가와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면, 다자이는 말없이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응시하다 이내 입을 맞추었다. 그러면 아쿠타가와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고, 죽음의 절망도 공포도 없이 초연한 그의 눈동자는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기다란 속눈썹이 눈가에 살며시 내려앉자 다자이는 아쿠타가와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집어넣어 그를 탐했다. 텔레비전에서 들려오는 – 세탁기에 넣고 돌리기만 하면 깨끗해지는 세제 광고와 집을 한층 더 편리하게 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동산 광고는 사라지고 없었다.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후덥지근한 열기가 남아있는 바람이 창가에 매단 풍경을 어루만지며 방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우아하고 정적인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옷자락을 살며시 쥐었고, 다자이는 그의 검고 흰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키스는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얇은 반팔 티셔츠를 위로 올려 그대로 그의 몸을 범할 때도 있었고, 그저 입술을 떼고 가만 서로를 안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다자이는 가슴 한 편에 묵직하고 뜨거운 감정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아쿠타가와의 고른 숨결이 가슴팍에 닿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이름을 입에 담는 그의 애절함이, 죽음의 무게와 함께 더해져오는 까닭이었다.

“다자이 씨.”

그는 언제나 자신을 그렇게 불렀더랬지. 한 점 흔들림 없는, 올곧은 눈동자로. 변하지 않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다자이를 불렀다.

그것은 죽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현관문에 열쇠를 꽂아 넣고 돌렸다. 문이 열리고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다자이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한 손에 들고 있던 - 슈퍼의 이름이 크게 박힌 비닐봉투가 발치로 떨어졌다. 노을의 그림자 같은 보랏빛 하늘이 창밖에 넘실대는 저녁이었다. 귀찮다는 이유로 미처 정리하지 않은 이부자리에 아쿠타가와가 잠든 것처럼 죽어있었다. 그는 늘 집에서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친 채 누워있었다. 죽었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을 보아왔다. 오십 미터 떨어진 곳에서도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판가름할 수 있었다. 아쿠타가와는 죽었다. 그의 방에서, 죽어 있었다.

다자이는 이것이 뇌가 만들어낸 단순한 환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순간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감정이 다자이를 지배했다. 아쿠타가와가 죽은 이후로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덮어두기에 급급했던 감정이, 더할 나위 없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쿠타가와가 보고 싶었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가 죽고 나서야 그의 이름을 올곧게 부를 수 있었다.

“아쿠타가와.”

그 단순한 이름이 여름의 정적을 울렸다.

매미 울음소리가 그쳤다.

 

 

 

* * *

 

 

 

더러운 호수에서 올라오는 악취가 무더운 여름의 공기와 만나 다자이의 코끝을 시큼하게 자극했다. 그는 호수 주변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호수를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수면 아래에 잠겨있을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그러면 시간은 그늘 한 점 없는 땡볕 아래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그 영원과도 같은 시간의 틈새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와 그의 발치에 떨어졌다. 문득 고개를 들면 그곳에는 츄야가 낯선 표정을 하고 서있었다. 그 사이 부쩍 수척해진 몰골이었다. 다자이라고 해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왔나. 왔으면 기척이라도 해야지.”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능청스럽게 말을 붙였으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츄야는 연인의 불륜을 추궁하는 것 같은 매서운 눈빛으로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정적이 흘렀다. 다자이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츄야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순순히 자백하지도 않았다. 그저 서있었다. 그의 눈빛은 썩어가는 호수의 밑바닥처럼 어두웠다.

“다 알고 왔으니까, 그냥 말해.”

기나긴 침묵을 깨고 츄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평소와 같은 거친 말투였지만 어렴풋한 피곤과 가라앉은 분노가 묻어나왔다. 다자이는 그가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한 일에 대해, 좀 더 정확히는 아쿠타가와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그는 포트마피아의 간부였고, 요코하마의 어둠 속을 흐르는 모든 정보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러니 다자이가 여름 동안에 한 일을 대강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그 짐작에 대한 확인을 위해 부른 것이겠지.

하지만 다자이는 그 어떠한 것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츄야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 지, 무엇을 알고 싶어 하며 무엇을 알고 있는지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훤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호수를 향해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무의미한 침묵이 이어지자 참을 수 없었던 츄야가 서서히 언성을 높였다. 고압적으로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호수의 악취와 뒤엉켜 다자이를 괴롭혔으나 여전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네가 아쿠타가와를 빼돌리기 위해 폭발 사고를 공작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네놈한테 던진 – 아쿠타가와가 죽었다고 생각되는 당시의 사진을 살피다 폭발의 흔적이 미묘하게 엉성하다는 것을 알았지. 공간단절을 발동했지만 시간에 못 맞춰서 폭발에 휩쓸렸다는 건 아쿠타가와를 빼돌리기 위해 네놈이 만들어낸 거짓말이잖아. 그러니까 말해. 아쿠타가와는 어디에 있어?”

“……아쿠타가와는 죽었어.”

무성의하기 그지없는 다자이의 대답에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멱살을 잡았다. 그는 힘없이 츄야의 손에 끌려갔다. 츄야와 다자이의 시선이 서로 마주했다. 다자이의 눈빛은 매워지지 않는 끝없는 허무와 공허함에 허덕이고 있었고, 츄야의 눈빛은 상대방을 질타하는 끝없는 분노가 차오르고 있었다. 분명 츄야는 아쿠타가와의 장례식을 떠올리고 있을 터였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고 만 긴의 얼굴과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여름날 행해진 우울한 장례식과 시체 없이 꽃만 가득한 빈 관이 땅에 묻히던 순간들과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다자이를, 그리고 그가 아쿠타가와가 죽는 순간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던 이유를 짐작했을 것이다. 아쿠타가와를 죽은 것으로 공작한 것이 다자이이고, 그를 빼돌린 것도 다자이니까,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에 아쿠타가와는 살아서 다자이의 곁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도, 어딘가에 살아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있기에 냉랭한 그의 반응에 화를 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이윽고 다자이가 운을 땠다. 츄야에게 멱살을 잡혔음에도 여전히 덤덤한 표정으로, 숨이 막힐 정도로 타오르는 태양 아래에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아득한 시간과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악취를 느끼면서, 천천히 대답했다.

“츄야가 무엇을 예상했는지, 어디까지 알아냈는지는 잘 알았네. 자네는 훌륭하게도 내가 아쿠타가와를 빼돌리기 위해 사전공작을 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 정말이지 포트마피아의 간부다워. 게다가 증거사진까지. 빼도 박도 못 하는 완벽한 증거야. 맞아. 인정하지. 폭발사고는 내가 꾸민 일일세. 하지만 자네의 추리에는 커다란 흠결이 있네.”

“뭐?”

“내가 왜 굳이 아쿠타가와를 공식적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하고 빼돌렸는지, 그 이유가 결여되어있어.”

“……”

“아쿠타가와는 죽었네. 자네는 그가 살아있길 바랐겠지만, 그는 이미 죽었어. 어떻게 죽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아. 어차피 그는 죽을 운명이었네. 그 폭발사고가 있든 없든, 내가 그를 빼돌리든 빼돌리지 않든 상관없이 말이야.”

의미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내뱉던 다자이는, 이내 차분히 고백했다.

“그리고 아쿠타가와를 죽인 건 나일세.”

차가운 고백에 한여름의 뜨거운 풍경이 서늘하게 얼어붙었다.

 

 

 

* * *

 

 

 

그가 자신에게 찾아와 고개 숙여 부탁하던 순간을, 다자이는 기억했다.

요코하마 인근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한적한 카페였고, 만개하던 벚꽃이 지고 공기가 차츰 습기를 머금으며 더워질 무렵이었다. 아쿠타가와가 먼저 연락을 해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모리의 전언이라도 전하려는 건가 했으나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애초에 그는 부드럽고,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부탁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내였다. 다자이가 카페에 찾아와 맞은편에 앉아 커피를 주문하자마자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그는 대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했다. 길어봤자 한 달. 그 이후로는 살아있을 가망이 없다고 의사가 이미 분명하게 선고를 내렸다고 했다. 몸이 망가져서 손 쓸 방도가 거의 없으며,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것 또한 매우 기적이라고. 시한부를 선고받은 환자에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생활을 처분하고 병원에 입원하여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거는 것. 아니면 죽음을 받아들이고 남은 삶에 충실하며 다가올 죽음을 준비하는 것. 아쿠타가와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그래서,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뭔가?”

“소생을 죽여주십시오.”

“뭐?”

“과분한 소망이지만 스스로 소생의 마지막을 선택할 수 있다면, 꼭 당신 손에 죽고 싶습니다.”

그의 새까맣고 올곧은 눈동자가 다자이를 향했다. 흔들림 없이 과녁을 향해 나아가는 화살처럼, 그의 시선이 박혔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쿠타가와가 그것을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는 것을. 어처구니없을 지도 모르는 소망이지만, 그것이 진실 된 그의 바람이라는 것을 다자이는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선뜻 자네를 죽여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꺼려한 적이 있었던가. 죽이지 않은 사람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죽일 수 없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떤 불합리한 조건에 있더라도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사람은 쉽게 죽었다.

피로 물든 과거의 습관과 새로이 머리를 들이미는 -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다자이의 안에서 충돌했다. 아쿠타가와는 자신의 앞에 놓인 진한 녹차를 두고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자이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창 밖에서 쏟아지는 따뜻한 온기가 그의 뺨을 간질였다. 더운 여름날 입천장이 데일 것 같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자신의 안에서 충돌하는 양가적인 감정이 하나로 정리될 때까지 기다렸다. 카페 안을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 음악을 들으면서, 때로는 그 가사를 곱씹으면서.

이윽고 대답했다.

“알겠네.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 말을 듣자 긴장으로 굳은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이완되면서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자신을 죽여주겠다 약조해주어서 감사하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의 새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다자이의 가슴 한 구석 어딘가에 석연찮은 기분이 입안의 모래알처럼 남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의 다자이는 그 감정이, 그의 죽음을 기꺼워하지 않는 자그마한 불편함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다자이는 알 수 있었다.

아쿠타가와를 죽일 수 없을 것이라는, 운명의 혹은 본능의 경고였던 것이다.

 

아쿠타가와와 함께 지냈던 이주간의 시간들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마치 절대로 그 순간들을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신이 입김을 불어넣은 것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순간들이 찬란하게 빛났다.

그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아쿠타가와의 얼굴과 이름이 박힌 지명수배지의 절반이 수거되었을 무렵 다자이는 아쿠타가와와 함께 바깥을 산책했다. 얼마 전 비가 한바탕 쏟아진 덕분에 공기는 상쾌했으며 햇살은 맑고 투명했다. 아쿠타가와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푹 눌러쓴 채 다자이가 사다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공원을 산책했다. 햇빛이 낯선 것일까, 코트가 없어 불안한 것일까 아쿠타가와는 때로 몸을 흠칫거렸다. 자주 걸음이 늦어졌고, 아주 가끔 걸음이 멈추기도 했다. 다자이는 그런 아쿠타가와의 보조를 맞추었다. 걸음이 느려지면 느려지는 대로, 멈추면 멈추는 대로 함께 있어주었다. 현기증이 이는지 머리를 짚기에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잎이 넓은 나무 아래에 놓인 벤치에는 그늘이 드리워져있었다. 다자이는 자판기를 발견하고는 이온음료와 물을 사서 돌아왔다. 앉아서 말없이 음료를 마셨다. 아쿠타가와의 이마에 땀이 맺혀있었다.

“많이 더워?”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퍽이나 다정한 질문이었다. 4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했을 말이기도 했다. 아쿠타가와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기다란 속눈썹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시선이 잠시 그에게 머무는 가 싶더니 고개를 돌렸다. 넓은 챙에 그의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그렇게 덥지는 않습니다.”

“그래? 땀을 많이 흘리기에 물어봤어.”

“……다자이 씨야말로, 덥지 않으십니까?”

분명 언제나 자신이 감고 다니는 붕대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서툰 관심이었다. 상대방의 안위를 묻는 것이 어색해서 창백한 뺨을 붉게 물들이고서는 새초롬하게 앉아있었다. 다자이는 그런 아쿠타가와가 조금, 귀여워서 웃었다. 사람을 죽이고 자신에게 인정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필사적으로 자신의 뒤만 쫓던 아이가 누군가를 돌아볼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게다가 답지 않게 붉어진 얼굴과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가다듬는 모습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그의 웃음에 아쿠타가와는 흘깃 그를 쳐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두 뺨이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난 괜찮네. 익숙한 일이니까. 덥지도 않아.”

“……그렇군요.”

“자네는, 이렇게 산책해 본 적 있어?”

아쿠타가와는 고개를 저었다. 모자챙의 그늘 아래로 그의 눈이 느릿하게 깜박였다. 새까만 눈동자는 공원으로 흘러들어오는 사람들과 여름의 풍경들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부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다만, 모든 것이 새삼스러운 듯했다. 살아있다는 것도, 밤이 아닌 낮의 세계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공원을 거니는 발걸음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싱그러움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마저도.

“소생은 이런 곳에 올 생각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이런 행복을 누릴 자격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어째서? 일마치고 잠시 들리면 되잖아.”

한참 말이 없던 아쿠타가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마 자신이 시한부가 아니었다면, 이주보다 더 많은 시간이 있었더라면 말하지 않았을 속마음이 흘러나왔다.

“당신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아쿠타가와의 옆모습은 낡은 영화관에 앉아 혼자 스크린을 바라보는 노인처럼 과거의 삶을 되짚고 있었다. 새까만 눈동자에 이름을 알 수 없는 공허가 차올랐다. 더운 햇살이 싱그럽게 만물을 비추는 가운데, 그의 눈동자만이 서글펐다.

“당신이 없는 소생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어지는 고백에 그는 불쑥 아쿠타가와의 마른 손을 잡았다. 놀이공원에서 산 풍선이 하늘 위로 도망쳐버릴까 두려워 끈을 꼭 쥔 어린아이처럼. 문장이 끊어졌다. 무더운 여름, 아쿠타가와의 손은 차가웠다. 그가 가만 고개를 돌려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것일까. 언제나 꾹 다물고 있는 입술이 살며시 벌어져있었다. 넓은 모자챙 아래, 그림자에 잠긴 아쿠타가와의 시선이 물어왔다. 자신에게 닿아있는 이 온기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자이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칼을, 모자챙을, 옷깃과 살결을 간질였다. 그리고 말했다.

“바다에, 갈래?”

“……네?”

“가본 적 없을 거잖아, 한번도.”

“……”

“요코하마에 살면서 바다에 가본 적이 없다니. 아깝지 않아?”

“하지만 이제 와서,”

“나랑 함께 가면, 분명 의미가 생길 거야.”

주저하는 아쿠타가와에게, 다자이는 그렇게 말했다. 모든 불안이 사라져버릴 것처럼 단호하게, 어두운 마음의 그늘을 비추는 햇살처럼 다정하게. 아쿠타가와의 얼굴 위로 나뭇잎 사이로 새어나온 여름의 햇살이 내려앉았다. 아쿠타가와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고, 다자이는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쥔 채 놓지 않았다.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며 지나다니는 공원에서 둘만이 고요했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아쿠타가와가 망설이며 물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응. 물론이지.”

대답과 함께 다자이의 입가에 보드라운 미소가 떠오르자 그제야 자신의 손을 붙잡은 다자이의 손을 향해 시선을 떨구었다. 그 순간이 잊힐까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자신의 손등 위로 겹쳐진 다자이의 손을 바라보았고, 이내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그 순간 아쿠타가와의 얼굴을 본 다자이는 말없이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입 맞추었다. 금방이라도 떠날 것 같은, 삶의 중력에서 모두 벗어난 듯한 공허한 표정이 불안했다. 사라질 것 같아서. 그래서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 아쿠타가와는 죽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의 곁에 있다는 것을. 세상에서는 지워졌을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다음날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데리고 바다로 향했다. 바닷바람이 폐에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이제 곧 죽을 사람에게 큰 문젯거리는 아니었다. 아쿠타가와는 여전히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가만히 서서 파도를 타고 모래사장에 밀려오는 바다를 가만 바라보았다. 다자이는 그런 그의 손을 잡아 끌어 같이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그는 깊은 강물에 발을 내딛는 사람처럼 신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투명에 가까운 바닷물이 새하얀 그의 발을 적셨다. 차가워. 그가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자이가 웃었다. 그럼, 차갑지.

“여름의 바다는 차가운 법일세.”

아쿠타가와는 그러한 사실을 처음 들은 사람처럼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여름의 바다는 차갑군요. 여러 번 되뇌던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다자이 또한 그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발목이 겨우 잠기는 – 파도가 되어 밀려오는 바닷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쿠타가와가 느닷없이 고백했다.

“당신이 소생의 부탁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자이는 말없이 그를 보았으나 아쿠타가와는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새파란 하늘과 이어진 바다를, 바다가 끝나는 지점과 하늘이 시작되는 지점 그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챙이 넓은 모자는 그의 얼굴도, 표정도, 시선도 모두 가려 보여주지 않았다. 아쿠타가와의 손을 붙잡은 손에 말없이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제게 삶의 의미를 줄 거라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가끔 생각합니다. 당신이 삶의 의미를 주지 않았더라면 스무 살의 소생이 있었을 지를. 분명,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죽었겠지요. 한때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당신이 미워지기도 했습니다만.”

“계속 미워해도 난 상관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네는 내 것이니까.”

그의 대답에 아쿠타가와는 말없이 웃었다. 입술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옅게 울리다 사라졌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자이를 바라보았다. 새까만 시선이 그에게로 와 박혔다. 한없이 올곧고 차가운 눈동자였다. 그러나 그의 눈가에는 아주 옅은 물기가 맺혀있었다. 그는 미소 짓는 것 같기도, 울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다자이는 그에게서 무슨 말이 나올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아쿠타가와가 쓰고 있던 모자를 빼앗으려 손짓했다. 그는 남아있던 한 쪽 손으로 모자챙을 꽉 쥐고서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당신과 함께하는 바다는 무척, 행복하군요.”

그 순간 다자이의 가슴 속에 아쿠타가와를 죽여주겠다 약속했던 그날 느꼈던 이질적인 감정이 다시금 머리를 들이밀고 나타났다. 문득 자신이 죽일 수 없는 인간이 지금 바로 눈앞에 서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다자이는 말없이 아쿠타가와를 끌어안았다. 그의 더운 숨결이 가슴팍에 닿았다. 파도가 천천히 밀려들어와 수평선 쪽으로 사라졌다. 다자이의 가슴팍이 조금 젖어들었다. 아쿠타가와의 입술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창가에 달린 푸른빛의 풍경이 더운 바람결에 울었다. 아쿠타가와는 해가 중천에 뜬 이른 시간,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있었다. 그의 장례식 이후로 줄곧 입었던 새하얀 반팔 티셔츠 위에 계절에 맞지 않는 검은 겨울 코트를 걸쳤다. 짧게 드러난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으나 표정은 고요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고, 때때로 아무것도 없는 낡은 천장을 바라보았으며 창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가 가장 오랫동안 보고 있었던 것은 다자이였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보아온 사내가 그의 옆에 있었다. 그는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조금은 서운해 하는 것도 같았으며 자세히 보면 슬퍼하는 것도 같았다. 탐정사 기숙사에 사람은 다자이와 아쿠타가와 단 둘 뿐이었다. 세상에 오로지 둘만이 담겨진 것 같은 아주 완벽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몸은 좀 어떤가?”

죽어가는 아쿠타가와에게 대단히 우스운, 별반 의미 없는 말이었으나 아쿠타가와는 희미한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오늘 해도 괜찮아?”

“괜찮습니다.”

“내일 하면 안 될까?”

“상관없습니다.”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어떤 물음에도 즉각 대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사람이 내뱉는 대답이라고 하기에 그의 문장은 묘하게 활기에 넘쳤다. 여름 햇살이 비추는 그의 얼굴을, 다자이는 가만 바라보았다. 그가 알고 있던 아쿠타가와보다 조금, 안색이 나쁠 뿐 달라진 점은 거의 없었다. 메마른 몸과 날카로운 눈매와 기다란 속눈썹, 짧게 드러난 이마, 그리고 검고 흰 독특한 머리칼.

다자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쿠타가와의 뺨을 어루만지고 기다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손끝에 닿는 체온이 차가웠다. 호흡은 얕고 거칠었으며 올곧은 시선이 때때로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였다.

텅 빈 정적 속에서 아쿠타가와의 마른기침이 새어나왔다. 다자이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아쿠타가와를 위해 빨대를 입에 물려주었다. 목울대가 살며시 움직이며 물을 삼켰다. 모든 장면이 선명하게 와서 박혔다. 마치 영화의 롱 테이크를 찍듯이 분명하고 또렷하게 각인되는 것이다.

“……아쿠타가와.”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그렇듯 올곧게 대답한다. 다자이는 그의 대답이 서글펐다.

“네, 다자이 씨.”

“……왜 나한테 자네의 마지막을 맡긴 건가?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일부러 죽은 척을 해가며 몸을 숨기지 않아도 충분히 남은 삶을 즐길 수,”

“다자이 씨.”

아쿠타가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의 말을 잘랐다. 아주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창문을 타고 바람이 들어와 다자이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아쿠타가와는 아주 느리게, 끝없는 심해 속에 잠긴 것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다자이의 손을 그러쥐었다. 시선은 언제나 그렇듯이 그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이 다가왔음에도, 그가 평생 바라봐온 사람이 자신을 죽이는 데에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평온했다. 다자이는 그런 그의 눈빛이 생경했다.

“당신이 삶의 의미를 주었던 순간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그동안 살아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니 이것이 지나친 소망일지라도, 소생은 당신이, 꼭 당신만이 소생의 마지막까지도 가지길 바랍니다. 소생에게 주었던 삶의 의미를 다자이 씨가 다시 거둬가기를 바랍니다. 소생의 삶은 당신의 것이기에, 죽음 또한 당신의 것입니다. 매우 간단한 일입니다. 늘 해오던 것처럼, 소생을 죽여주십시오.”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건가.”

“네. 꼭, 당신이어야만 합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다자이는 결심한 듯 미리 준비해두었던 약과 물을 입에 담았다. 아쿠타가와의 새까만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다자이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머금고 있던 약과 물을 넘겨주었다. 미처 삼키지 못한 물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수면제와 치사량의 독을 섞은 약이 아쿠타가와의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 그는 독약도, 죽음도 어느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서서히 지옥과 같은 수면 속에 잠겨가는 목소리로 아쿠타가와가 말했다.

“당신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기나긴 정적이 찾아왔다. 방안에 스미던 거칠고 불안정하던 숨소리가 점차 고르고 옅어졌다. 다자이는 방에 완전한 정적이 찾아올 때까지 아쿠타가와의 곁을 지켰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태풍이 몰아쳐도 깨어나지 않을 고요 속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잠이 들자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며 훨씬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으로 바뀌었다. 다자이의 손을 그러쥐었던 그의 가느다란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미약하게 이어지던 숨소리는 몸이 한번 움찔, 하더니 서서히 들리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그는 완전히 숨을 거두었다.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영원한 잠에 빠지게 된 것이다.

다자이는 잠든 것처럼 죽은 아쿠타가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지난 이주동안 보아왔던 어떤 아쿠타가와보다 편안해보였다.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방을 청소하고, 미리 장을 봐온 채소들을 꺼내 손질할 것만 같았다. 다자이는 그의 뺨과 머리칼과 관절이 불거진 손가락 마디마디를 차례로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그는 다자이가 처음으로 거둔 아이였고, 처음으로 삶의 의미를 주었던 아이였다. 그를 처음 발견하고는 전율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고, 어떤 거센 발길질에도 거둔 적이 없던 자신을 향한 시선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쿠타가와는 언제나 다자이를 소망했고, 그가 주었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겼다. 자신이 그를 버리고 떠난 순간에도 아쿠타가와는 언제나 그를 믿었다. 있을 것이라고, 어딘가에 반드시 살아있을 거라고, 그렇게 다시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이번에는, 틀림없이.

말하지 않았지만 그 맹목적인 고집이 다자이는, 썩 마음에 들었다.

처절하게 싸우며 몸을 혹사시키는 아쿠타가와도, 자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쿠타가와도, 자신을 ‘다자이 씨’로 부르는 아쿠타가와도, 자신을 향한 새까만 시선이 복잡한 감정으로 차오르는 아쿠타가와도, 꽤나 좋아했다.

“자네는 나에게 특별해.”

순간 그가 죽기 전에는 미처 할 수 없었던 말이 단단한 감성의 요새를 뚫고 흘러나왔다.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도 모두 경계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 그를 덮쳐왔다. 그의 죽음을 구심점으로 빛마저 흡수하는 블랙홀과 같은 공허가 가슴 깊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다자이는 핏기가 가신 아쿠타가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동화 속, 깊이 잠들어버린 공주를 깨우는 왕자의 키스처럼.

“아쿠타가와.”

난 아직, 자네에게 하지 못한 말들이 있어.

그러나 아쿠타가와가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 * *

 

 

 

츄야와 다자이는 썩은 악취를 풍기는 호수 앞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있었다. 친한 친구와 주먹다짐을 한 이후에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몰라 정적만이 이어지는 –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둘은 시선을 마주하는 일 없이 가만히 정적 속에 시간을 죽였다. 츄야가 결투장을 던지듯 다자이를 향해 내던진 사진은 그의 손에 얌전히 쥐어져 있었다. 수십 번을 들여다보았던 사진이었다. 아쿠타가와가 죽었던 현장에 남겨진 새까맣게 그슬린 폭탄의 흔적이 선명하게 박혔다. 폭발의 흔적이 유독 어설프다는 사실을 눈치 챘을 때 느꼈던 흥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쿠타가와가 살아있을 거라 생각한 유일한 단서는 다자이의 차가운 고백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츄야는 그제야 다자이가 내뱉은 수수께끼 같은 말들이 퍼즐조각처럼 제자리에 맞춰졌다. 어차피, 아쿠타가와는 죽을 운명이었던 것이었다. 자신은 조금 더 일찍, 그의 죽음을 맞이했을 뿐이고, 다자이는 조금 더 늦게 맞이했을 뿐이었다. 다만, 그 차이였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났으나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자이는 그저 건조한 눈길로 말없이 볼품없는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고, 츄야한테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짧은 시간에 쏟아진 –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실들이, 그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문득 그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알려주는 거냐.”

“……”

“끝까지 입 다물고 있었더라면 아무도 몰랐을 텐데.”

다자이의 시선이 잠시 츄야에게로 향했다. 마치 포트마피아에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차갑고도 냉혹한,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위태로워 보이는 시선이 그에게 박혔다. 다자이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운 채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긴에게 어떤 진실을 전하는 게 좋을지 자네한테 맡기기 위해서지. 이대로 묻어둬도 상관없고, 내 손에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고, 병으로 죽었다고 해도 상관없어. 어느 쪽을 전하던 자네 맘일세.”

“비겁한 자식.”

“후후. 이미 수없이 들은 소리네.”

다자이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 정도 비난쯤이야 가뿐하다는 듯이.

츄야는 어처구니가 없어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으나 다자이가 남의 말을 순순히 듣는 위인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엉덩이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냈다. 다자이는 츄야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느 샌가 고개를 돌려 호수를, 아무것도 없는 악취만 풍기는 호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그런 그의 모습이 츄야가 알고 있던 다자이와 어딘가 달랐으나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몬 본 척 시선을 거두었다.

“이만 간다. 아쿠타가와가 죽었다면, 네놈에게 이제 더 이상 볼일은 없어.”

“그래. 긴을 잘 부탁해.”

“……앞으로 넌 어쩔 거냐.”

그의 물음에 처음으로 다자이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금방이라도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것처럼 가벼운 미소였다.

“살아야지. 자살하면서.”

참 지독하다는 듯한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츄야는 자리를 떴다. 악취가 가득한 호수에는 다자이 혼자 남겨졌다. 뜨거운 햇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을 아쿠타가와를 생각했다. 그가 보고 싶었다. 아주 절실하게, 생생하게. 이번에 붙잡으면 놓지 않을 요량이었다. 같이, 같이 가라앉을 것이다. 죽음과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고 썩은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뼈 밖에 남지 않은 백골의 손가락에 깍지를 낄 것이다. 그리고 말해줘야지.

무척이나 보고 싶었다고.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다자이가 호수 가장자리에 발을 내딛었다. 불투명한 호수의 물이 그의 구두바닥을 적셨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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