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하늘에 소낙비
:흔히 있을 만한 일이니 조금도 놀랄 것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쿠타가와는 물을 싫어하지만 끈적거리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좆같은 태양. 다자이가 준 코트도 입을 수 없고, 자신이 싫어하는 물로 몸을 씻어야한다는 것이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아하는 계절은 뜸들이면서 말하겠지만 싫어하는 계절은 바로 말할 수 있었다. 여름. 매년 더워지는 날씨에 욕을 뱉으며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던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는 찬물로.
그렇게 바쁘지 않은 탓에 반차를 쓰고 나와 집에서 편한 옷을 입고 소파에 푹 퍼졌다. 최근에 구입한 에어컨을 25도로 설정하고 대충 누워 빨랫감처럼 너불너불 퍼져있었다. 여름은 언제 갈까? 겨울은 언제 오지. 겨울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한껏 뒤집어 낮잠을 청하려고 했다, 가 문득 다자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자이 씨는 한여름에도 붕대를 감고 있던데 안 더울까. 선천적으로 더위를 안 타는 건지, 참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보송보송하게 감긴 붕대를 보면 눈이 절로 찡그려졌다. 새삼스럽게 생각난 그의 모습에 대단하다 싶었다.
‘지잉-’
짧은 진동음이 한 번 울렸다. 문자인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들어 확인했다. 발신자 다자이 씨. 옥수수와 토마토, 감자가 한가득 담긴 광주리를 찍어 보냈다.
-겐지가 가지고 왔어. 맛있겠지. 퇴근하면서 가지고 갈게.
얄상한 손가락 브이가 함께 찍힌 사진은 퍽 그다운 사진이었다. 알겠습니다, 짧게 답장을 보내고 몸을 뒤척여 진짜 잠에 빠져들었다. 시원한 에어컨의 바람은 몸을 노곤노곤하게 만들기 딱 좋았다.
볼을 콕콕 찌르는 손길에 부스스하게 눈이 떠졌다. 언제 들어왔는지 소파 뒤에서 저를 내려다보면서 검은 봉다리를 흔드는 다자이를 몽롱한 눈으로 멀뚱히 바라봤다.
"자고 있었네?“
"아... 언제 오셨습니까."
"방금. 빨리 일어나. 옥수수 먹자. 맛있더라."
다자이는 식탁 의자를 끌어 앉은 뒤 한껏 푸욱 쪄진 옥수수를 예쁜 접시에 가지런히 두기 시작했다. 잠을 툴툴 털어내고 아쿠타가와도 그와 마주보고 앉아 다자이가 집어 든 옥수수를 몽롱한 눈으로 바라봤다. 먹어. 재촉하는 손길에 손끝으로 받아들어 고시고시한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음식을 먹을 때면 꼭 나오는 버릇이었다. 빈민가 시절에는 상한 음식을 피하려고, 다자이 밑에서 구를 때는 독이 들어있는 건 아닌지 알아보려고. 오래된 습관은 쉬이 고쳐지지 않았다. 아쿠타가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다자이의 눈살에 못이겨 조금 베어 물었다. 향 좋은 옥수수의 단맛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고득고득 씹히는 옥수수가 일품이었다.
"맛있지?“
아쿠타가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맛있다는 말을 하기 부끄러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예전부터 그랬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가 먹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한 입 크게 베어 물어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없이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여름 하늘에 소낙비처럼 아무 것도 아닌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사귄다. 연애를 한다. 입에 굴리기도 낯선 행위는 아쿠타가와에게는 상상 이상으로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것들이었다. 밤늦게까지 임무를 하고 도어락을 열고 들어가면 왔어? 하고 반겨주는 다자이의 얼굴에 익숙해지기까지 정확히 33일이 걸렸다. 아직도 적응이 안 되는 거야? 문 앞에 쪼그려 앉아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아쿠타가와에게 현관문을 빼꼼 열고 그의 정수리에 다자이의 말이 꽂힌 적도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곧 익숙해지기는 했지만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은 여전했다.
다자이는 날이 덥다는 이유로 근처 작은 호프집에 가자고 아쿠타가와를 꼬드겼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건 아쿠타가와 본인도, 다자이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아주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쿠타가와는 술집 특유의 분위기를 꽤나 좋아했다. 사적인 만남이 이어지는 장소, 한 잔 두 잔 기울이는 술잔과 매콤하고 짭쪼름한 안주들. 시시콜콜 인생 얘기를 나누는 정다운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즐거움에 아주 가끔 다자이에게 은근한 어필을 하며 같이 한 잔 기울이기도 했다. 날도 덥겠다 시원한 생맥주가 그리워진 다자이는 아쿠타가와를 이끌고 자주 가는 작은 호프집에 갔다. 안주 말고 반주. 작은 닭튀김과 크림생맥주 두 잔을 시킨 뒤 그들이 원하던 평범한 일상 속에 조금씩 녹아들어갔다.
"여름도 지나가겠지?“
"예. 그리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겁니다.“
"날도 더우니까 잠이 오질 않아. 정말 싫다.“
다자이는 한숨을 푹 쉬며 애꿎은 닭튀김에 구멍을 푹푹 만들었다.
"붕대라도 풀고 다니면 꽤 시원할 텐데요."
"모르는 소리. 이 붕대가 없으면 살이 타 버려.“
아 예, 어련하시겠습니다. 죽어도 살이 타는 건 싫다는 다자이에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선크림을 바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끈적거리는 감각이 싫다고 회피했다. 양산을 쓰고 다니면 어떠냐는 질문에는 너무 예쁘면 아츠시 군이 탐낸다며 이상한 논리로 회피했다. 큭큭 웃으며 건배 짠. 조금씩 기울어지는 술잔에 아쿠타가와도, 다자이도 조금씩 취해갔다. 푸슬푸슬 나오는 웃음 뒤에는 묘한 감각이 일어났다. 키스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술기운에 빌려 작은 입맞춤을 하고 싶다. 다음 날 취했다는 이유로 기억 안 난다고 둘러대고 싶다. 그러면 다자이 씨도 이해해주지 않을까. 아쿠타가와는 다자이의 입술만 지그시 바라봤다. 아,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입을 맞추...
"아쿠타가와?"
다자이의 목소리에 아쿠타가와의 영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거의 반쯤 혼을 빼놓고 실없는 생각을 줄곧 했다.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으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더운 여름 날 마시는 맥주는 목구멍을 차갑게 만들었지만 따끈한 볼은 식혀주지 못했다. 다자이는 그런 아쿠타가와를 바라보곤 마지막 맥주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제 갈까?
뜨거운 여름날의 바람은 불고.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자이와 아쿠타가와는 나란히 걸었다. 해가 졌다고 그래도 조금은 시원해진 공기에 조금은 기분이 들뜬 둘은 조용히 밤길을 걸었다,
"그러고보니 아쿠타가와는 사랑한다는 말을 거의 안 했네.“
"... 그런가요.“
"그런가요는 무슨, 진짜 그래. 내 기억으로 마지막으로 한 게 벌써 한 달 전인데?“
".......“
벌써 그렇게 됐나. 아니 부끄러워서 못하겠는 걸 어떡합니까. 아쿠타가와는 아랫입술을 꾸욱 먹으며 나오려고 하는 모든 말을 삼켰다. 조금만 입술을 떼면 취기와 함께 이상한 말들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느리게 눈을 꿈벅이며 스스로 세뇌를 걸었다. 지금 얼굴이 뜨거운 것은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날이 더워서 그런 거라고.
아쿠타가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그림자가 지고 이마 위로 작은 입술이 내려앉았다. 아무도 없는 길 가로등 밑 두 그림자가 살짝 겹쳐졌다. 다자이는 몸을 살짝 떼고 살풋 웃었다. 아.
"사랑해. 오늘도."
다자이는 아쿠타가와에게 한결같았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가혹했고, 간질간질한 마음을 나눌 때부터는 한없이 다정했다. 아쿠타가와는 지금 바로 사랑한다고 말을 꺼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입이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 입에 넣고 굴리기 참 어려운 단어였다. 소생도 당신을.
"... 소생도 사랑,“
합을 말하기도 전에 그대로 고개가 들려졌다. 그리고 가벼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심장이, 정말, 터지는 줄 알았다. 취기가 돌아서 그런 걸까. 아쿠타가와의 눈앞이 핑글핑글 돌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는 손은 다자이의 팔뚝을 잡았고 조금씩 움직이는 혀에 조금씩 안정을 찾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속담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여름 하늘에 소낙비 내린다. 여름날에 내리는 소나기는 흔히 있는 일이니 조금도 놀랄 것이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여름 하늘에 내리는 소나기가 안 놀랄까? 아쿠타가와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는 사람을 허둥지둥하게 만들고 정신을 쏙 빼놓는다. 그렇지만 무더위를 식혀주는 소나기는 아주 반가운 존재다. 다자이는 아쿠타가와의 일상 속에 갑자기 스며들어 소나기처럼 푸욱 비를 내려 온 몸을 젖게 만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중한 소낙비처럼, 다자이 또한 그런 존재다. 소생도 사랑합니다. 아쿠타가와는 소나기속에 묻혀 들리지 않을지도 모르는 진심을 손끝에 흘려보냈다.